2021. 9. 17. 17:30ㆍ★★★★경제&기업 ISSUE/경제ISSUE
'중앙은행에 맞서지 마라.' 월가의 유명한 격언이다. 중앙은행의 흐름에 역행하는 투자를 하면 큰코다친다는 얘기다. 금리와 통화량을 조절하는 중앙은행은 금융 시장에선 제왕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투자회사는 중앙은행의 행위를 분석하고 예측하는 기구를 운영한다. 한마디로 떼돈을 벌고 싶다면 중앙은행의 정책을 제대로 예측하면 된다. 중앙은행 통화정책 흐름에 역행하면 쪽박을 차는 것은 시간문제다. 금융시장뿐만 아니라 경제성장률, 실업, 고용 등 경제지표도 금리에 큰 영향을 받는다. 우리나라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의 금융통화위원회는 지난 8월 말 기준금리를 0.5%에서 0.75%로 0.25%포인트 올렸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통화정책은 여전히 완화적"이라며 추가 인상을 시사했다. 한은이 금리 인상으로 정책 방향을 튼 것은 2017년 11월 이후 처음이다. 통화정책 흐름이 약 4년 만에 바뀌었다. 문제는 앞으로다. 과연 한은은 금리를 얼마나 올릴까.
시장이 한은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한은이 금리를 올린 지난 8월 26일부터 9월 10일까지 단기금리 지표인 3개월 만기 양도성예금증서(CD) 금리는 0.19%포인트 올랐다. 한은의 기준금리 인상분(0.25%포인트)을 반영한 결과다. 하지만 장기금리 지표인 3년 만기 국고채 금리는 기준금리 인상 직후에는 오히려 하락했다가 9월 들어서는 다시 소폭의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장·단기 금리가 엇갈리게 움직인 것은 미래 전망과 관련이 깊다. 한은이 이번엔 금리를 올렸지만 앞으로 계속 올릴지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한다는 의미다.
경제 내의 적정 금리는 실질경제성장률과 물가상승률을 합한 수준으로 본다. 올해 우리 경제의 성장률 전망치가 4%, 소비자물가상승률이 2%인 것을 감안하면 이론적인 적정 금리는 연 6% 안팎이다. 현재 3년 만기 회사채(AA-) 금리가 연 2%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금리 수준은 턱없이 낮다. 그렇다고 한꺼번에 금리를 대폭 올릴 수는 없다.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통화정책의 '베이비 스텝' 이론을 제기했다. 아이 걸음처럼 기준금리를 조금씩(0.25%포인트) 올리면서 경제 상황을 관찰하는 것이다. 금리를 올리면 성장률이 하락하고 물가가 떨어진다. 그러다 보면 명목금리와 성장률, 물가가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룬다. 대략 금리 4% 선에서 성장률이 3%, 물가가 1% 정도로 형성되는 식이다. 이를 감안하면 중앙은행이 시중금리가 연 3~4%에 이를 때까지 기준금리를 계속 올리는 것이 경제 논리에 따른 통화정책 방향이다.
정치논리로 통화정책 변질
하지만 세상은 경제논리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중앙은행은 유일하게 돈을 새로 찍어 낼 수 있는 기관이다. 이 은행의 발권력은 정부 입장에서는 매우 매력적인 '돈주머니'다.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쓰고 싶은 유혹이 생긴다. 중앙은행은 금융 시장에선 황제와 같은 존재지만 정부와의 관계에선 고양이 앞에 쥐처럼 나약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정부가 중앙은행을 통해 돈을 찍어내고 싶은 유혹이 더 커진다. 예를 들어 통화량이 100조원인 경제에서 통화량을 10% 늘리면 늘어난 돈은 대부분 국채 매입 등을 통해 정부로 흘러 들어간다. 물가가 통화량에 정확히 비례해서 오른다면 통화량을 늘린 실익은 없다. 하지만 대부분 경제에서 중앙은행이 늘린 통화는 직접 시중에 유통되는 반면 물가는 시간을 두고 오른다. 이 때문에 통화량을 늘리면 정부가 쓸 수 있는 자원이 일단 많아진다. 중앙은행이 정부와 독립적인 의사 결정을 해야 하는 이유도 정부의 자의적인 개입을 막기 위해서다. 대부분 정부는 중앙은행 독립을 보장한다고 겉으로는 말하고 있다. 하지만 막상 정책을 펴다 보면 말과 행동이 다른 경우가 태반이다.
2011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토머스 사전트 미국 뉴욕대 교수는 정부와 중앙은행 간 관계를 한 주머니를 서로 나눠 갖고 있는 두 기관으로 묘사했다. 두 기관의 의사 결정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정부가 쓸 수 있는 돈은 일반적으로 세금을 걷거나 국채 발행을 통해 조달한다. 정부가 매년 발표하는 예산안에는 이 같은 계획이 담겨 있다. 중앙은행도 나름대로의 통화정책 방향을 정한다. 정책이 조화를 이룰 때는 별문제가 없다. 하지만 정부가 갑자기 거둬들인 세금보다 훨씬 많은 재정지출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정부가 한없이 적자를 볼 수는 없다. 이때 중앙은행은 발권력을 동원해 돈을 찍어내고 이 돈으로 정부가 발행한 국채를 인수하고 부족한 세금을 메운다. 이 과정에서 통화량은 늘어난다. 공동으로 돈을 모아 쓰는 부부의 경우 아내가 카드를 무지막지하게 긁으면 남편이 열심히 벌어 카드 값을 내야 하는 것과 비슷하다.
정부가 돈 풀고 통화량으로 메워
우리 정부도 그동안 한은의 발권력을 십분 활용했다. 2017~2020년 정부지출 증가율은 연평균 9.4%에 달한다. 코로나19 사태로 돈 풀기가 심해지며 2020년 증가율은 13.4%로 더 높아졌다. 반면 국세를 기준으로 한 세금 증가율은 평균 4.3% 정도다. 경제가 어려울 땐 세금이 덜 걷히고 정부지출은 늘어난다. 같은 기간 한은이 찍어내는 본원통화 증가율은 연평균 11.5%에 달한다. 정부가 지출을 늘리자 세금으로 충당하지 못한 부분을 한은이 돈을 찍어내 메운 셈이다. 정부가 앞뒤 가리지 않고 막대한 지출을 할 수 있는 것도 이처럼 한은이라는 발권력을 동원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일단 돈을 쓸 만큼 충분히 쓰고 청구서를 한은에 내밀면 한은은 이에 맞춰 돈을 찍어내 메워준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 한은이 돈을 찍어내 물가가 오르면 국민의 실질소득은 떨어진다. 월급이 100만원인데 물가가 5% 오르면 내가 살 수 있는 물건 양이 5%만큼 줄어들어 실질임금은 95만원 선으로 떨어진다. 결국 현재 정부가 재정지출을 늘리면 이는 다음 세대의 세금 인상과 함께 물가 상승 부담까지 떠넘기는 것이다. 물가 상승에 대한 국민 부담 증가를 '인플레이션 세금'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그럼 중앙은행은 항상 정부에 끌려다녀야만 할까. 중앙은행이 정부를 이끌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중앙은행이 먼저 나서서 금리를 올리거나 통화량을 줄이고 이를 반드시 관철시키겠다는 배수진을 치면 상황은 달라진다. 이때 정부는 줄어든 통화량을 전제로 살림살이를 짜야 하기 때문에 씀씀이를 줄여야만 한다. 중앙은행이 선제적으로 통화정책 수준을 정하면 정부는 이를 전제로 예산을 편성하는 구조다.
사전트는 중앙은행과 정부는 누가 먼저 움직이는가, 그리고 자신의 행동은 수정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면 정책을 이끌어갈 수 있다고 봤다. 1979년부터 1987년까지 미국 연준을 지휘하며 '인플레이션 파이터'로 명성을 높였던 폴 볼커 전 FRB 의장은 강한 카리스마로 통화량을 선제적으로 관리해 물가를 잡았다. 중앙은행이 먼저 움직이고 그 신호가 확실하면 정부가 무분별하게 재정지출을 늘리지 못한다는 점을 보여준 사례다. 반면 벤 버냉키 전 FRB 의장은 금융위기로 초토화된 경제를 살리기 위해 정부가 재정지출을 확대하자 천문학적인 돈을 푸는 양적완화(QE) 정책으로 화답했다.
내년 선거로 금리 인상 동력 상실
한국은 어떨까. 한은은 8월 기준금리를 올린 동기부터 의심받고 있다. 이미 시중에 풀린 돈으로 부동산 등 자산 시장에 거품이 커진 지 오래다. 물가도 연초부터 연 2%대를 넘나들었다. 물가와 자산가격 안정을 위한 선제적 금리정책을 펼 시기를 놓쳐버렸다. 그러던 중 정부가 가계부채 억제를 지상 과제로 삼겠다는 방향이 나왔고 한은은 때맞춰 기준금리를 올렸다. 정부의 무지막지한 대출 규제 정책에 대해 한은이 금리 인상으로 그 명분을 제공했다는 해석이다. 한은이 기준금리를 올린 직후 정부는 내년 예산안을 편성하면서 정부 지출 증가율을 8.3%로 책정했다. 내년에도 막대한 돈을 쓰겠다고 공언한 것이다. 나랏빚이 1000조원을 넘었지만 여전히 돈 씀씀이를 늘리겠다고 밝히면서 '기준금리 인상'이라는 한은의 통화정책 의지를 무력화시키고 있다. 정부의 신호는 분명하다. 예산을 늘려놨으니 나머지는 한은이 발권력을 동원해 맞추라는 것이다.
내년 3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재정지출은 계속 늘고 정부 곳간은 텅텅 빌 것이다. 계획보다 지출이 더 늘어날 수도 있다. 이 경우 한은이 통화량을 늘려 정부지출을 뒷받침하는 금융정책을 펼 수밖에 없는 구조다.
한은이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올해 안에 한 번 정도 기준금리를 올릴 것이지만 이후 추가적인 금리 인상은 어려울 것이라는 해석이 현실적이다. 이 경우 한은 기준금리는 내년까지 1% 선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이 정도 금리 인상으로 금융 불안정을 해소하고 자산가격 거품을 제거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변수는 하나 남아 있다. 국내 요인만 놓고 보면 정부와 한은 간 게임은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문제는 대외 변수다. 우리나라는 선진국 대열에 올랐지만 국제 금융 시장에서의 존재는 미미하다. 미국에서 불어오는 태풍에 달러가 빠져나간다면 충격은 일파만파로 번진다. 미국은 조만간 돈 푸는 양을 줄이는 테이퍼링에 착수할 조짐이다. 그다음은 금리 인상이다. 이런 미국이 통화 긴축 신호를 보내면 개발도상국에 퍼져 있던 달러화의 본국 회귀 현상이 뚜렷해진다. 이때가 되면 기초체력이 튼튼하지 못한 국가들은 외환위기를 겪을 가능성이 높다.
외환위기는 통화가치의 불안정에서 시작된다. 우리나라도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금융위기 때 외국 자본이 이탈하면서 원화값이 급락해 위기를 겪은 경험도 있다.
사실 요즘 같은 전환기와 국제경제 상황을 볼 때 한은의 금리 인상은 대내 문제라기보다는 대외 문제로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외국 자본 이탈로 원화값 하락세가 심상치 않으면 금리를 계속 올려 대응할 수밖에 없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실제 8월 말 달러당 원화값이 1180원선 밑으로 떨어지며 외환 시장이 불안한 모습을 보인 것도 8월 기준금리 인상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한은의 기준금리 조절 정책에서 외환 시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커지고 있다.
[노영우 금융부장·경제학 박사]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매일경제신문 21.09.15A3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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